2025. 3. 21. 23:46ㆍ나의 책장
'지구 끝의 온실' – 기억을 지우는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고 사는가
김초엽의 '지구 끝의 온실'을 읽고 나서 나는 긴 침묵에 빠졌다. 책장을 덮은 후에도 이야기는 내 안에서 한참을 머물렀고, 무언가를 말해야 할 것 같은 강한 충동 속에서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. 기후 재난, 기술문명, 기억 삭제라는 익숙한 SF적 배경을 입었지만, 이 소설이 가장 날카롭게 다가온 지점은 아이러니하게도 ‘감정’과 ‘기억’이라는 아주 인간적인 것들이었다.
기억을 없애주는 일이 직업인 주인공을 따라가며, 나는 끊임없이 되물었다. 기억을 지운다는 건 고통을 없애는 걸까, 아니면 나를 지우는 걸까. 고통을 피하려고 했던 내 지난 삶의 순간들이 머리를 스치면서, 이슬의 침묵과 회의, 그리고 결국 감정을 회복해 가는 흐름은 곧 내 이야기가 되었다. 이 책은 기후 위기의 미래보다, 망각의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더 많은 경고를 주는 이야기였다.
작가의 문체는 서늘하면서도 몽환적이었다.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정확히 감정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짚어냈고, 그 절제된 문장이 주는 무게감이 내면을 서서히 파고들었다. 이 소설을 읽는다는 건 단순히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, 내 안에 있는 잊고 싶은 장면들을 마주보게 되는 일처럼 느껴졌다. 때로는 이슬이 지운 기억들이 내 기억과도 겹쳐졌고, 그게 얼마나 날카롭고 아픈 일인지 알게 되었다.
무엇보다도 인상 깊었던 건, 이 소설이 끝까지 인간의 존엄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. 인간이 만든 온실이라는 인공적 공간 속에서도, 감정을 잃지 않으려는 한 사람의 내적 갈등은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을 되찾기 위한 여정이었다. 과학과 기술이 인간의 본질을 대체할 수 없다는 메시지는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마음속에 남았다.
이 작품은 잔잔하지만 깊은 물결처럼 나를 흔들었다. 극적인 장면이나 화려한 서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, 소설의 분위기와 정서가 하루 종일 뇌리에 맴돌았다. 그것은 마치 아주 어릴 적 꿈속에서 본 낯선 풍경처럼 선명하면서도 모호했고, 그 낯섦이 오히려 위로처럼 다가왔다.
읽고 나니, 삶이란 결국 ‘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끌어안고 가는 것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. 고통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, 고통 속에서도 인간으로 남는 법을 배우는 일이었다. 그리고 이슬이 걸어간 그 길이, 결국 우리 모두가 걸어야 할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여정처럼 보였다.
'지구 끝의 온실'은 내게 상처와 감정을 외면하지 말라는 조용한 요청이자, 인간이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묻는 문장이었다.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오랜만에 정직해질 수 있었다.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SF를 넘어, 내 삶의 어느 순간에도 꺼내 읽고 싶은 이야기로 남게 되었다.
이미지 출처 : 자체 제작 및 yes24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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